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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업적 귀주대첩 살수대첩

by 힐링 힐러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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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업적 귀주대첩 살수대첩

 

 

안녕하세요 역사하리입니다^^

오늘은 고려시대 거란과의 전쟁 고려 거란 전쟁의 히어로 강감찬 장군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 영웅 강감찬 업적 생애, 귀주대첩 살수대첩에 대해 알아봅니다~

 

 

고려 시대

 

918년 태조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왕조를 계승했습니다. 고려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로.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했습니다.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를 남겼으며,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후기에는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다가 1392년에 이성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방송이미지 캡처

현종은 고려 제8대 왕으로, 태조 왕건의 손자인 안종 욱과 경종의 비였던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헌정왕후와 아버지 안종 욱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성종이 병약하여 후사를 두지 못하자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었고 조카인 대량원군 대신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거란과의 전쟁을 겪었으며 이후에는 국가 안정화와 경제 발전에 노력하였습니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왕으로 유명하며, 관용의 리더십으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특히 1018년 거란의 2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 장군을 파견하여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

 

고려와 거란의 전쟁 역사는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군사적, 외교적 입장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은 또한 고려의 내부 정치, 군사 전략, 여진족, 중국 송나라, 이후 몽골 제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란 요 왕조는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에 여러 차례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993)

거란은 고려에게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침입하였습니다. 서희의 활약으로 거란은 고려와 화해하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의 땅을 확보하였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1010)

이 침략은 성종황제의 거란이 시작한 침략으로,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목적으로 규모가 더 컸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이 침입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갔습니다.

 

거란의 3차 침입(1018)

거란이 고려에게 강동 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침입하였습니다. 강감찬의 지휘 아래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서로 교류하지 않았으며, 거란은 고려를 침입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거란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수호한 고려의 전쟁과 궁극적인 성공은 한국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강감찬 장군과 같은 인물들은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강감찬 업적

강감찬(姜邯贊)은 강감찬(948∼1031)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명장으로, 거란의 침략을 세 번에 걸쳐 막아내고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내는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1011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왕의 안위를 위해 직접 적진에 나아가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이후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을 때에는 상원수로서 흥화진에서 적을 막아내었습니다. 또한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공으로 현종에게서 '추충협모안국공신' 칭호와 '검교태부 겸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의 작위를 받

았으며, 103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에는 '인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거란의 재침을 막고 고려의 영토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까지 고려가 대외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강감찬은 지금까지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귀주대첩

 

귀주대첩은 1019년 2월 1일,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都統使)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大將軍)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龜州)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약 25년간 이어졌던 여요전쟁(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종식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회복력과 군사 전략을 보여주는 한국 역사에서 기념되는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11년 2차 침입이 무산된 후, 거란은 1018년 소백야 장군이 이끄는 3차 침입을 시작했습니다. 거란군은 고려 내부 분쟁을 이용하여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1019년 현재의 귀주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거란의 참패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거란군은 고려 영토에서 철수하였습니다.

승리로 고려의 사기와 위신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로써 거란의 침략이 종식되고 고려의 주권과 독립이 확고해졌다.

강감찬 장군은 민족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귀주해전에서 그의 뛰어난 전략적 능력은 한국군사에 전설이 되었습니다.

귀주해전은 고려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동아시아 지정학적 위상을 확고히 한 고려왕조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살수대첩

 

살수대첩은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중 하나로,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나라 군대를 대파한 전투입니다.

살수대첩은612년(영양왕 23년)에 일어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로, 살수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대첩이자 한국 전쟁사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승전 중 하나입니다. 흔히 강감찬의 귀주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불립니다.

고구려군은 수의 보급선을 끊고, 살수(현재의 청천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는 고구려의 작은 군대가 대규모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결과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승리는 고구려가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살수대첩과 같이 언급되는 것은 귀주대첩 또한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군대를 격파한 전투로 당시 고려의 입지와 역활을 공고히 했다는 의미에서 같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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